[인터뷰] "자격증 하나 딴 자신감으로 명장이 되다"

대한민국 표면처리 분야 1호 명장 배명직 대표

이학명 기자2016.03.04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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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많은데, 전부 응하기는 힘들어요. 그런데 여기는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대한민국 표면처리 분야 1호 명장인 배명직 기양금속 대표(57). 그는 하이하이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여서 인터뷰에 응했다고 했다. 청소년기 문제아에서 지금의 명장이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고, 그 이야기를 청소년들이 듣고 힘을 내줬음 하는 바람이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자격증 하나만 갖고 서울에 상경해 취업한 이야기, 20대 중반에 회사 대표가 된 이야기, 회사를 운영하며 명장으로 가기까지의 이야기 등 정말 짧은 세월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시골농부의 맏아들로 태어나 한국을 대표하는 표면 기술 명장이 된 배 대표를 안산의 기양금속 사무실에서 만났다.

“어릴 때부터 형편이 안 좋아서 반 농부로 지냈어요. 중학교 때는 5㎞ 정도를 걸어다닐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고. 사춘기를 맞으며 담배 피고 술 마시고 비행청소년 비슷한 시기를 겪었어요. 공부하고도 완전히 담을 쌓고 지냈죠.” 배 대표의 학창시절은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막 살았던 시기였다. 고등학교 진학 즈음에는 성적도 되지 않았거니와 대학 진학은 1%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빨리 돈 벌 수 있는 것을 찾다가 경쟁률이 낮은 경북 영주공고 화공과로 진학했다. 그곳에는 80명 두 개 반이 있었는데 고등학교를 재수했던 친구부터 문제아라고 낙인 찍힌 친구까지, 소위 비행청소년과 건달들의 집합소였다.

“중학교 때 내가 놀던 환경하고 비슷했어요. 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책 1권 이상을 갖고 다니지 않을 정도로 공부하고는 완전히 담을 쌓고 지냈어요. 그렇다고 완전히 깡패나 건달로 불릴 정도는 아니었고 그냥 영웅심리에 젖어 지냈던 것 같아요.” 게다가 배 대표는 동생 셋이 있는 장남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병대 1기 출신인 아버지가 공부에 대해서 자주 말하고 심하게 간섭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도금을 시작하다

“고등학교 2학년 말 자격증 제도가 만들어졌을 즈음 선생님이 ‘자격증이라도 따야 먹고 산다’고 나를 설득하더라구요. 그때 나 자신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5개월 동안 정말 밤새며 공부했어요.” 80명이 시험을 보고 10명이 1차 합격을 했는데 거기에 배 대표가 포함됐다. “그때 처음, ‘나도 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문제아 배명직이 바뀌기 시작한 거죠.” 결국 2차 시험까지 합격해서 ‘화학분석기능사 2급’이라는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때 기분은 정말 하늘을 날아갈 듯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 딴 자격증 하나가 나를 명장까지 이끌었구나라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3학년 2학기 때 동기들이 취업을 나갈 무렵, 배 대표는 자격증 하나만으로 좋은 기업에 추천받지는 못해 취업할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대구에 가서 아연도금공장에 취직했다. 첫 직장. 공장의 환경은 너무 열악했다. 도금공장에 공해를 정화할 수 있는 시설이 없어서 일주일 내내 코피를 흘릴 정도로 악조건에 시달리며 일했다. “친구는 3개월 일하고 포기하고 나는 2달을 더 버텨 5개월을 일했어요. 저도 담도 걸리고 건강도 안 좋아져서 더 이상 못 버티겠더라구요.”

그 이후로 혼자서 낚싯대 공장, 피혁 공장, 양말 공장, 염색 공장 등 도금과는 관계없는 공장까지 전전했다. “한 번은 방직공장에 갔더니, 예쁜 누나들이 나를 엄청 귀여워해줘서 오래 버티기도 했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다가 안경태 만드는 공장에 들어갔는데, 무역하는 부장이 회사를 차리며 나를 스카웃했어요. 뿔테안경을 염색하는 일이었는데, 당시 일할 때는 조금 ‘안정’이라는 것을 느꼈던 것 같아요.”

달콤한 회사 생활도 잠시, 얼마 안 돼 군대 영장이 나왔다. 곧바로 찾은 것이 방위산업체였다. “어린 마음에 군대 가기가 싫어서 방위산업체 취업을 정말 간절히 원했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인터넷도 안 되던 시절이었고, 전국에 정식 방위 산업체도 30여곳 밖에 안 돼서, 취업할 곳을 찾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소문 끝에 서울시 도봉구에 삼우금속공업이라는 방위산업체 도금공장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날 바로 청량리행 야간열차를 타고 물어물어 공장으로 갔다. 가자마자 ‘집안의 누구를 아는 사람이다’라고 거짓말을 하고 공장장을 만났다. 그리고 공장장을 만나자마자 큰절을 했다. “사실 자격증 믿고 이곳에 취직하러 왔습니다. 월급은 안 주셔도 좋습니다.” 다행히 공장장은 젊은 친구의 기백이 좋다고 느꼈는지 내일 바로 일하라고 했다.

◆20대 중반에 사장이 되다

첫 배치를 받은 곳은 폐수처리장이었다. 그런데, 배 대표가 취업하고 일주일 뒤 선임이 군대에 갔다. 이제 책임은 배 대표 몫이 됐다. 선임이 대충 알려준 메모장으로 당시 배 대표가 폐수처리를 지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곧바로 문제가 생겼다. 며칠 뒤 공장인근인 도봉산 일대의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 것. 폐수 정화가 덜 돼서 일어난 일이다. 대형사고를 친 셈이다. “그 때부터 폐수처리에 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24시간 책상에서 벗어나지 않고 공부하고 책상 주변에서 잠도 자고 했어요. 6개월 즈음 되니 폐수처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더라구요.”

이후 배 대표는 도봉구청 환경담당 공무원과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에 도봉구청을 찾아갔다. 담당공무원과 친분을 갖게 됐고 자신이 일을 맡은 지 6개월 만에 모범사업장 팻말을 받게 됐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나이도 어린 친구가 일 잘한다’며 인정을 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인정은 더 많이 움직일 수 있는 열정으로 작용했다. 배 대표는 회사 돌아가는 일을 조금 더 깊이 알기를 원했다.

“공장에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화학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고 도금도 잘 몰랐어요. 어깨 너머로 배운 사람이 대부분이라, 품질관리와 표준화를 회사에 접목시키는 부서에 배치되게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다른 부서에 배치된 배 대표는 공정표준화를 완성시켰고 불량률을 줄이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성과를 내니 입사 2년이 안됐는데 회사에서 처음으로 계장이라는 타이틀을 달아 줬다. 당시 나이가 24살이었다.

“‘기술부 계장 배명직’이라는 명함이 처음 나왔을 때의 뿌듯한 감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뭔가 이뤘다는 느낌도 들었고.” 계장 명함을 달고 나서는 탄력이 붙어서 더 열심히 뛰어다녔다. 사장이 되겠다는 꿈으로 구매부, 영업부, 기술부 등 모든 회사과정을 섭렵했다. 그런데 몇 년 못가서 문제가 생겼다. 방위산업 근무 10개월을 남겨 두고 회사가 부도가 난 것. 당시 영업총괄과장이라는 직책을 맡은 시기였는데, 친분을 가졌던 서울사무소장(법정관리인)의 도움을 얻어 부도난 공장에 ‘명일금속’이라는 간판을 걸고 회사를 시작했다.

“자금이라고는 아버지가 소 팔아서 마련해준 200만원이 전부였어요. 자금도 부족했고 장비도 없어서 고물상을 뒤져서 도금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우여곡절 끝에 회사가 돌아가게 만들었어요.” 거래처에 리어카로 도금된 금속을 납품하면서 눈물겹게 회사를 운영해갔다. 기계, 약품을 확보할 돈은 물론, 끼니조차 잇기가 어려워 회사 귀퉁이에서 직접 밥을 지어 먹기도 했다.

다행히 주변에서 동업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신망을 얻어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또 일이 터졌다. 회사가 자리잡나 싶은 상황에서 누가 병무청에 신고를 했다. 10개월 남은 근무기간이 문제가 된 것이다. 곧바로 그 기간을 채우기 위해 사장이라는 타이틀은 그대로 두고 법정관리로 유지됐던 삼우금속 창원 공장에서 품질관리를 담당하는 일을 했다.

◆하기 싫은 공부가 즐거워지다

당시 창원 공장은 국방품질검사소에서 아예 상주를 하던 시기였다. 검사소 직원의 결재 도장 하나로 일정이 늦춰지기도 하는 상황이었다. 사장이 배 대표에게 ‘그 담당자를 사로 잡으라’는 특명을 줬다. 그런데 검사소 담당자는 대졸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배 대표와 일하는 것을 꺼려했다. “무턱대고 그 사람을 찾아가 ‘대학 안 나온게 무슨 큰 잘못이냐’며 그 사람을 설득했어요. 그리고, 그 당시 국방규격을 달달 외우다시피 했고 검사 담당자도 나름 장악했어요.” 사장의 특명을 제대로 실행에 옮긴 것. 당시 국방규격을 외운 것은 지금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런데, 창원공장에서 10개월 기간을 채우고 회사에 복귀하니 부도난 회사라고 그 건물은 팔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당시 협력업체 담당자가 공장을 하나 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삼원금속공업’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회사를 시작하게 됐다. 지분 30%짜리 사장이었지만 빈털터리인 배 대표 입장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삼원금속도 부도가 나면서 신용보증에 연보입보가 됐다는 이유로 배 대표가 속한 공장도 압류에 들어갔고 공사가 중단됐다. 아무 생각 없이 모 보증기금에 8억원을 보증선 것이 화근이었다.

일을 준 업체는 일 처리가 안 되니 난리를 피우며 욕을 하기 시작했다. “지나고 보면 그 때만큼 힘든 시기가 없어요. 죽을 각오로 이겨내야 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주변에서 ‘힘든 시기에 기인이 나타난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구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몸 담았던 삼우금속 법정관리인에게 전화를 했고 그 문제가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법정관리인이 신용보증기금에 데리고 가서 보증을 서지 않아도 될 사람이 섰다는 것을 말했고, 직접 1억원 정도를 빌려주며 대위변제까지 해줬다. 그리고 압류가 풀리는 날 명목상 삼원금속을 그 사람이 대표로 있는 기양금속으로 파는 조치를 취했다. 그 보증건이 해결되면서 1년 만에 1억원을 갚을 정도로 회사는 정상적으로 운영됐다.

“1992년 11월 상호가 바뀌면서 큰 도약기를 맞았어요. 국방품질검사소를 통해 대전 이북지역 방위산업체 일은 싹쓸이 하다시피 했어요.” 그런데, 당시 검사소 사람들은 박사 출신이 많아서 이론적인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배 대표가 대학 진학을 결심한 이유다. 서른다섯 나이에 인천재능대학 표면처리과에 입학했다. 특수도금기능사, 전기도금기능사 자격증도 따며 공부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정말 공부하기가 싫었는데 간절히 원하고 필요하니까 공부가 되더라구요.” 기능장에 도전하자는 생각도 있어 인근에 있는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신소재공학과에 편입해 공부했다. 그리고, 기능장 시험에 두 번 떨어지고 세 번째 만에 기능장 자격증을 따냈다. “자격증을 따고 나니, 언론에서 나를 조명하기 시작했어요. 이후로 대학원을 졸업하고 시간강사도 하고 지금 경기과학기술대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지 8년째 됐어요.”

꿈에 그리던 명장에 도전했고, 2007년도에 꿈에 그리던 명장이 됐다. “기능한국인, 산업현장교수, 호산대학 최고의 영예인 석좌교수 임명 등 타이틀이 이때 많이 생긴 것 같아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성공시대’를 부르짖으며 기술선진국을 강조했다. EBS에서 내로라하는 사람 10명이 강의를 했는데, 그중 여덟번째가 배대표였다. 당시 가장 성공적인 강의였다는 평가를 얻었다. 전국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왔고 마이스터고, 특성화고에도 강의를 나가기 시작했다.

“회사도 일사천리로 발전해 나갔어요. 방산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 국방 품질관리소로부터 공정승인을 받았고, ISO9001 외에도 INNO-BIZ 기술혁신형 기업에 선정되었어요. 크롬 프리 피막처리 기술을 개발해 양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기양금속은 97년 품질경영시스템 인증을 시작으로 2002년 유망 중소기업 선정, 2004년 기술 혁신 중소기업 인증, 2005년 환경경영시스템 인증 등 다양한 성과를 냈다.

“기업을 운영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가장 힘든 것은 자금 문제입니다. 우리 회사도 조금만 자금이 뒷받침됐으면 조금 더 발전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지금은 신용보증기금 등 정부 자금을 많이 쓸 수 있는데, 예전에는 자기 돈으로만 하던 시절이었잖아요.”

◆노력을 가능하게 하는 ‘꿈’

최근 배 대표는 회사에 또 다른 변화를 줬다. 스위스를 갔더니 한국을 대표하는 물건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명장 10여명을 규합해 한국산업기술대학교 80평 규모에 명장관을 만들어 명장의 물건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의 '불멸의 황금칼'이라는 이름으로 황금칼을 만들었다. “5년 이상 노력해 만든 황금칼은 평생 연구한 도금기술의 집약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 칼로 전세계를 재패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황금칼은 Olive 방송에서 아바타 쉐프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배 대표는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뿌리 산업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뿌리 산업에 진출하면 100% 성공할 수 있어요. 3D 업종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젊은층이 많이 없어요. 특히 표면처리 업종은 장치가 필요 없이 할 수 있는 사업이라 장래가 밝아요. 생활용품에서 우주항공에 이르기까지 없어서는 안 될 첨단 기초핵심 분야입니다. IT, 핸드폰, 반도체 부문만 하더라도 도금에 따라 완성품의 품질이 결정되잖아요.”

배 대표는 고등학교에 대한민국 최초의 표면처리과를 만드는 데도 기여했다. “합덕제철고가 뿌리 산업을 하는 최고의 고등학교인데 지난해부터 명장공방을 하면서 17명을 차출해 교육하고 3개월 만에 모두 자격증을 땄어요.” 아쉬운 것은 꾸준하지 않은 학생들이 많다는 점. “너무 나약하고 꿈이 없어요. 무조건 대학가는 수능 공부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자기 재능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잖아요. 자신이 손재주가 있는지 또 다른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해요. 꿈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꿈은 노력을 가능하게 하고 노력은 꿈을 이루게 합니다.”

☞ 본 기사는 <하이하이>(hi.moneyweek.co.kr) 제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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