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학력, 이제는 부딪쳐 볼 만한 사회입니다”

특성화고 졸업 후 26년 최연소 기능한국인 된 ㈜제이비엘 이준배 대표

이학명 기자2015.08.29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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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이야기 1


“일반고와 특성화고 선을 무너뜨려서 모든 고등학교를 직업 교육화시키고 공부가 미치도록 좋은 친구들만 공부를 잘 할 수 있도록 북돋워 주는 게 맞지 않겠어요?” 


지난해 6월 ‘이달의 기능한국인’에 선정된 ㈜제이비엘 이준배(46)대표는 직업교육에 관심이 많다. 그도 특성화고를 졸업해 26년 동안 기계 설계분야의 외길을 걸으며 인정 받는 CEO 자리에 오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1999년 종잣돈 300만 원으로 제이비엘을 창업해 현재 연 매출 100억 원대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19살에 직장생활을 시작, 고졸 사원으로 이해 안 되는 학력 차별을 겪기도 했다. 


그는 “문화적으로 기능인을 대우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적 문화가 되어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를 세종시 iBUILT SEJONG(아이빌트세종)에서 만나 청소년기부터 지금까지의 스토리를 들었다. 



간략히 자신을 소개한다면?
흔히 말하는 기능인 출신 고졸 CEO다. 예전과 다르게 요즘엔 대학이 평준화 되면서 나 같은 사람이 오히려 특이한 스펙이 된 거 같다. 나는 19살에 직장생활(금성계전: 현LS산전)을 시작해 기능올림픽 선수 생활을 했다. 서른 살까지 회사를 다니다 2년 정도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공부하고 32살에 창업했다. 이제 ㈜제이비엘(이전:준텍)이라는 회사를 창업한 지 16년째 되었다.


대학에 갈 기회들이 많았을 듯한데?
졸업은 안했지만 두 번 대학을 다녔다. 사실, 대학을 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대학이라는 학력보다 현실적인 문제가 더 크게 작용했다. 먼저, 부모님이 나 때문에 희생 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아예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 받고 할 정도도 아니었고 가정환경이 좋지 않아 월급을 받으면 가정에 도움이 되어야 했다. 8남매(5남3녀) 형제 중 막내인데, 윗 형도 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부모님이 고생하고 계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나 형제가 대학을 다니면서 가정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친구들하고 어울리고 하는 것도 보기 싫었다. 부모님은 고생하시는데, 저렇게 대학 다니려면 그냥 일해서 경제적으로 가정에 도움을 주는 게 낫겠다하는 생각이 들더라.




경제적 독립이 나의 가장 큰 숙제 


특성화고 진학은 스스로 선택한 것인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모두 있는 듯 없는 듯 다녔다. 중학교 졸업할 무렵 상위 30%정도 성적이라 담임선생님은 인문계를 추천했다. 그런데 나는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인문계를 가고 또 대학을 가면 경제적 독립을 빨리 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나 스스로 경제적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주변의 선배들이 공고에 가면 일찍 직장생활 할 수 있다고 했다.


‘경제적 독립’을 위해 무슨 노력을 했나?
특성화고를 갔더니 학생들이 작업복에 기름 묻혀 다니더라. ‘이건 생각했던 것과 다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기계설계하는 과는 기름을 안 묻히고 작업을 했다. 기계설계과를 선택하고 당시, 기능올림픽이 국가적으로 이슈가 되어 있을때라 학교 기능올림픽 선수단이 되기 위한 방법을 알아봤다. 메달을 따면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이상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말 겨울방학에 들어가기 전에 선생님을 찾아가 ‘기능올림픽 선수생활을 하고 싶다’라고 하고, 실제 함께 모일 때 갔더니 3명을 뽑는데 70명 정도가 와 있더라. 전부 나 같은 생각으로 온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겨울방학 내내 실력 테스트를 하는게 아니고 청소하고 심부름 잘하고 이런 것만 봤다. 그래도 나는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버텼다. 그리고 겨울방학 끝날 때 즈음 되니 대여섯 명이 남았고 그때 가서야 선을 그리게 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2학년 되기 전에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고 3학년 올라가기 전에 지방경기대회에 나가서 은메달을 땄다.


실업팀은 어떻게 들어갔나?
고등학교 2학년이 되니까 주변 친구들이 전부 대학을 갔다. 그래서 처음 입학 때와는 다르게 나도 대학가야겠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기능경기대회 선수를 하면 동일계 특별전형으로 갈 수 있는 유리한 점도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대학에 가기도 쉬웠다.
그런데 3학년 초 즈음 은사님이 대학가겠다고 하니, 실업팀 스카웃 제의 이야기를 하더라. 고심하다가 대학이 아닌 실업팀으로 생각을 바꿨다. 그렇게 지방대회 금메달을 딴 친구는 취업과 함께 군 면제 혜택을 받았고 나는 3학년 초에 학생신분으로 1년 계약직 실업팀 선수생활을 하게 됐다. 3학년은 회사에서 보낸 셈이다.


실업팀에서 어떤 성과를 거뒀나?
졸업을 하고 88년도 10월에 실업팀선수로 대회에 나가게 됐다. 3명이 실업팀 선수 구성인데 이미 전국대회 금메달을 딴 선배도 있었고 나 바로 위 선배가 금메달을 따고 국가대표 평가전을 통해 세계대회를 목표로 하는 실업팀이었다.
당시, 나는 막내라 주전선수가 아닌 예비선수 자격이었다. 그런데, 바로 위 선배 선수가 큰 실수를 했다. 오작을 제출해 실격처리 당해 메달에서 멀어졌다. 회사입장에서는 메달도 하나 없이 회사로 돌아간다는 것은 치욕적인 부분이었다. 그래서 선배작품을 대신해 연습삼아 나간 내 작품을 제출했다. 그리고 그 작품이 은메달을 받게 됐다. 그런데 나는 은메달을 거부했다.


메달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운동선수는 메달을 계속 딸 수가 있지만 당시 전국기능경기대회는 메달 한번 따면 끝이었다. 다시 출전을 못하게 된다. 대학을 포기하고 실업팀에 왔는데 은메달로 끝내기가 싫었다. “나는 연습 삼아 나간 경기고 다음해 선수다”라고 어필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회사입장에서는 돈을 들여 키운 선수가 메달을 안 받겠다고 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날 일은 하룻밤의 헤프닝으로 끝났다.
이후 금메달 딴 최고참 선배는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졌고 은메달을 딴 나는 자격이 안 되었다. 그래서 향후 3년간 세계대회 나갈 선수가 없어서 선수단이 해체되었다. 그렇게 세 명의 선수 생활이 끝났다. 그 이후 나는 회사내 금형설계쪽 파트로 옮겨 선수가 아닌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에도 바뀌지 않은 신분


첫 사회생활이 힘들지는 않았나?
사실, 선수 시절에 경력과 능력을 전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11시까지 대회 준비에 매달렸다. 365일 중 한 달에 하루 쉬고 353일을 꼬박 그렇게 훈련준비를 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대회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기능 올림픽은 올림픽에 버금가는 대회였다. 금메달을 따면 카퍼레이드도 하고 군 면제도 되고 했다. 그런 준비를 했으니 사회생활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학력에 대한 벽을 느끼진 않았나?
2년 정도 한 부서에서 일을 했는데, 설계부문 기술에서는 따라 올 사람이 없었다. 축구국가대표와 동네에서 축구하는 사람과 비교하면 될 것 같다. 설계사로는 최적이었지만, 3년 즈음 지나니 학부출신 신입사원들이 들어오더라. 어느 시점이 지나고 나니 그 사람은 진급을 했는데, 나는 진급이 안 되었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6-7년차가 되기 시작하니까 팀장이 진급에 대해 위로를 하기 시작하더라. 그때 처음 느꼈다. ‘대학을 가야됐는데’. 그 때 방송통신대 3학년까지 다녔다. 그리고 ‘이왕 다닐거면 제대로 대학을 가자’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대학을 갔나?
선취업후진학제도도 없던 시절이라 수능을 보고 국립 한밭대학교 기계설계공학과에 합격해서 야간대학을 갔다. 그런데 당시에는 회사배려도 많이 없었다. 회사가 밤 늦게까지 일하는 문화였기 때문에 눈치도 많이 봐야했다. 그런데 공부를 하고 학교를 다녔던 것이 즐거웠다. 그 와중에 나와 같은 입장의 선배를 봤다. 이야기를 해보니 선배들이 나와 같은 과정을 겪었더라. 그 선배들은 대학은 졸업했지만, 여전히 고졸사원이었다. 회사에서 나중에 대학을 가는 것은 인정을 안해 주는거다. 그래서 ‘그렇다면 나도 별반차이가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직을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나?
선배와 이야기 해보니 가정이 생기면 ‘가족을 위해 꿈을 내려 놓을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다른 회사에 가면 다시 시작하는 것이 두려웠고, 그 시작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혹시나 나쁜 결과가 자식에게 돌아오지나 않을까 고민을 했다.


창업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
대학 졸업을 해도 선배들과 같이 인정 못 받겠다 싶은 생각이 들고, ‘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당시 나는 대외적으로 설계업무를 하다 보니 외부 업체를 만날 기회가 좀 있었다. 초졸, 중졸인데 회사를 세워서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회사도 키워가는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창원으로 발령이 났다. 창원에 2년 동안 혼자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잘 아는 중소기업 대표를 찾아가서 ‘2년 동안 열심히 일 할테니 배울 수 있도록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회사에 가서 현실적 경영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것을 통해 계획서도 세웠다. 그리고 99년 9월 6일에 준텍이라는 1인 기업을 설립했다.




위기가 새로운 기회


어떤 아이템이었나?
그 당시 나는 설계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IMF초기에 유능한 엔지니어들이 회사를 그만 두고 정부는 벤처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장에는 소프트웨어는 가지고 있는데 하드웨어 기술자가 없었다. 벤처초기에는 그 기술자를 직원으로 쓰기 힘드니까 외부에 일을 주기 시작했다. 그 오더가 나한테 들어오기 시작하더라. 즉, 나는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구현해 내는 일을 했다. 그리고 1년이 될 무렵 기업의 연속성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다. 돈은 되는데 연속성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었다. 그런데, 설계를 요청할 때마다 만들어주는 걸로 공장을 차리기에는 무리가 있더라. 때마침 LS산전에서 인버터라는 제품개발을 해줬는데, 그것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 때는 제조업 인프라가 부족했던 시절이라 천덕꾸러기 같은 일들을 나한테 준거다. 지속성도 있을 것 같고 해서 일본에 가서 중고기계를 사오고 빈 농업창고를 빌려서 2002년 8월에 제조업을 시작했다. 11개월 만에 RND기업에서 제조기반서비스 사업으로 전환된거다. 이 사업으로 전환하면서 언젠가는 지식기반서비스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드웨어기업으로 풀 서비스를 제공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큰 경쟁력은 무엇이었나?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기능올림픽 선수시절 익혔던 설계능력도 있었지만, 도면을 보고 원가절감을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역제안을 했다. 그러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회사가 되었다. 성장할 즈음에 버는 돈을 계속 투자했다. 2005년까지 불과 7년 만에 70억 매출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위기는 없었나?
대기업의 설비투자 요구에 충분히 이익을 낼 수 있겠다 판단해 거대한 자본을 들여 설비와 인력을 늘렸다. 그런데 국제경기 하락과 시장흐름의 변화로 매출이 제로인 상태로 급여만 계속 나가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그 때 돈도 기술력도 없었던 한 사업가가 당시 붐이었던 골프 자동화 기계 설계 및 양산하는 일을 맡겼다. 여기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때 조직의 힘과 개인의 아이디어는 큰 시너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iBUILT SEJONG(아이빌트세종)’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iBUILT SEJONG(아이빌트세종)’은 국내 최초 순수 민간기업이 운영하는 1인 창조기업 비즈니스센터다. 모두가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공유경제’의 중요성을 깨닫고 설립했다. 개인, 기업, 학교, 공공기관과 연계해 제품 아이디어를 보유한 1인 창조기업과 일반인 등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됐다. 특성화고나 대학교 창업동아리와 연계해 예비창업자를 발굴하고 아이디어를 제품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아이빌트세종에는 비즈니스센터에 입주한 기업들을 관리하고 돕는 단기적 플랜의 트레이닝 캠프와 3D 솔루션 장비를 활용해 시제품을 쉽고 빠르게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는 중기적 플랜의 3D 솔루션 캠프, 원석과 같은 가공되지 않는 아이디어를 제품화 사업화 할 것인지 고민하고 지원하는 장기적인 플랜의 아이빌트 캠프 등이 있다.



직원은 비용이 아닌 자산이다. 


고졸사원을 많이 뽑는 것으로 아는데?
내가 고졸이니까 고졸을 뽑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높은 학벌의 인재를 뽑겠다는 욕심도 있다. 그런데 인재의 능력과 중소기업은 현실적 가치가 안 맞는 경우가 많다. 학벌이 좋은 사람이 와도 그 사람들이 발휘할 수 있는 일들이 당장 있지 않다. 말 그대로 오버스펙인 경우가 많다. 채용의 첫 번째 기준은 회사가 가지고 있는 일과 역할에 맞는 인재 채용이다. 두 번째는 내가 해줄 수 있는 대우에 맞는 인재를 데리고 그 인재를 키울 수 있는가가 중요한 요소다. 특성화고에서 직원을 채용하니 이런 요소와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많더라. 아직 미흡한 사람을 뽑아서 채우면 일류가 되겠지 하는 기대도 있다. 이제는 우리 회사 70% 이상이 특성화고 출신이다. 그런데 채용이 어려운 숙제이긴 하다. 고용을 하는 부분은 정점에 왔다고 생각을 한다. 이제는 창업을 통해 자연스러운 고용의 확대가 필요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직원은 비용이 아닌 자산이다. 지금도 계속 학교와 연계해서 직원을 뽑고 있다. ‘성장시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라는 원칙을 세웠다.


요즘 강의도 많이 다니신다고 하는데?
은사님이 ‘후배들을 위해 뭔가를 했으면 좋겠다’면서 직업교육 정책을 만드는 단체나 교육청 등을 소개하더라. 고졸취업 정책을 적극적으로 한 지난 정부에 특히 많이 불려 다녔다. 지금은 줄긴 했지만 특성화고와 제휴를 맺고 1년에 40회 정도 인식개선 특강도 했다. 학부모들의 인식개선을 위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이야기들을 하나?
내가 겪어왔던 일들을 나누는 것이 좋다. 나는 대학에서만 필요한 이론을 습득할 것이라는 생각하지 않는다. 선취업후진학은 학부모를 유혹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이고 선취업후학습이 맞다. 이런 쪽으로 이야기를 한다. 회사에서 일학습병행제도 참여하고 맞춤형교육도 하는데, 이런 경험담도 나눈다.


끝으로 고졸취업에 대해 하시고 싶은 말씀은?
우리회사는 1~2명 정도 매년 특성화고 학생을 뽑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회사는 3년 정도 적응할 수 있게 해주면 학생은 그 이후 몇 년을 버틸 수 있게 되고 선취업후학습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1년을 못 버티고 나오는 학생들이 많은데 이것은 회사가 어린 친구들에게 책임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 기능인을 대우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적 문화가 되어야 선진국이 된다. 변호사보다 배관공이 더 어렵고 힘든 일을 한다면 그 사람이 더 돈을 벌 수 있는 여지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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